무기력한 나날… “당신은 나를 일으켜 산 정상에 오르게 해줘요”[강동삼의 벅차오름]

무기력한 나날… “당신은 나를 일으켜 산 정상에 오르게 해줘요”[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기자
강동삼 기자
입력 2023-11-10 22:17
수정 2023-11-1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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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상고대가 핀 한라산의 모습. 빙꽃으로 변한 구상들이 보석보다 아름답다. 제주 강동삼 기자
올해 첫 상고대가 핀 한라산의 모습. 빙꽃으로 변한 구상들이 보석보다 아름답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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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만에 오른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서 만난 상고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40여년만에 오른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서 만난 상고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코로나19 백신접종 후유증인지 아니면 4050에게 갑작스레 찾아오는 심근경색 때문인지(전자라고 의심들지만 입증하긴 힘든) 2년 전 가을 이맘때쯤 퇴근길에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 앉았다. 밤새 고통 속에 지새우고 난 다음날 신촌 S대병원에 가 진료를 받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 비극의 드라마 한 장면에 나오는 대사처럼 의사가 “당장 수술(심장 스탠스 시술)을 해야” 한단다. 시술을 마친 다음날 병실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누워 있는데, 불현듯 ‘아, 이렇게 유서·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말 그대로 ‘인생무상’했다.

처음엔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멍했다. 주변에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는 듯. 그냥 물이 흐르는대로 살아가리라 하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졌다. 가장이니까 버티며 살아야지 하는 마음 뿐이었다. 돈도, 명예도 소용 없었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와 함께 삶을 뒤돌아보며 회한과 실의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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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코스로 올라가는 한라산 정상 아래 삼각봉의 모습. 알프스의 절경도 안 부럽다. 제주 강동삼 기자
관음사코스로 올라가는 한라산 정상 아래 삼각봉의 모습. 알프스의 절경도 안 부럽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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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봉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쪽으로 상고대가 핀 모습이 아른거린다. 제주 강동삼 기자
삼각봉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쪽으로 상고대가 핀 모습이 아른거린다. 제주 강동삼 기자


#액티브하게 혼자있는 시간은 걷기…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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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윗세오름의 가을과 상고대로 뒤덮인 백록담
<18>윗세오름의 가을과 상고대로 뒤덮인 백록담
슬픔도 고통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위안할 수 있는 게 전부였던 나날, 의지하게 된 곳이 오름이었다. 368개의 오름을 다 오르진 못하겠지만, 절반은 오르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처음엔 해발 100m(65m)도 안되는 도두봉을 오르는데도 숨이 찼다. 나를 일으켜세운 의사는 처음부터 절대 무리하면 안된다고 했다. 실제 숨이 차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쉬엄쉬엄 정상까지 올랐다. 그렇게 시작한 오름 산책의 시간은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다.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 저자이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인 한창수(55)씨의 말처럼 3040대 직장인들은 집으로 가면서도 집에 가기 싫단다. 부인도 아이도 싫은 게 아닌데 외롭다는 거다. 그는 번아웃된 날 위로하듯, 액티브하게 혼자있는 시간을 만들란다. 혼자있는 시간이 외롭다고 생각 말고 나만의 성장시간으로 바꾸란다. 쾌감 호르몬인 도파민이 줄어들면 기력이 달린다며. 그 책 속에 나오듯, 엄마가 아기를 보듬어줄때 생기는 옥시토신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액티브하게 혼자있는 시간은 내겐 ‘걷기’였다. 그렇게 하나 둘 오름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오롯이 혼자있는 시간. 8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올 가을, 무슨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인지 너무나 한라산 정상을 밟고 싶어졌다.

10월 끝자락, 새벽 한라산 탐방예약 사이트를 열어 사전예약을 취소한 남은 1개를 잽싸게 클릭하고 새벽 관음사로 향했다. 두려웠다. 정말 난, 1950m를 오를 수 있을까. 그것도 오롯이 홀로. 할 수 있을까. 정말. 해보자. 날이 저물지라도 천천히 가보자,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

계곡엔 단풍이 들고 있었다. 젊은 여자도, 동호회 모임도, 60대 부부도, 심지어 아이들도 나를 앞서갔다. 단풍은 곧 낙엽으로 변할 것이다. 영화배우이자 가수 이브 몽땅(1921.10.13~1991.11.9)의 ‘고엽’ 도입부에 나온 ‘진심으로 기억하길 바래. 우리가 친구여서 행복했던 그날들을’이란 독백처럼, 아니면 영어버전 에릭 클랩튼(1945.3.30~)의 ‘Autumn Leaves’의 가사처럼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 가을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듯, 생이 가려운 나무들이 하나 둘 옷을 벗기 시작한 10월 끝자락. 그때 나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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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의 가을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한라산의 가을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 삼각봉 대피소 절경은 알프스보다 더 아름다워 ‘찐 눈물’… 백록담 언저리엔 올 첫 ‘상고대’ 선물거의 70~80도에 가까운 계단을 올라 뒤를 보았을 때의 단풍을 만끽할 때 속으로 생각했다. 관음사 코스는 돌계단이 왜 이리 많은 지 한라산 가는 탐방로 중 가장 힘든 코스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탐라계곡 대피소를 지나 개미등에서 삼각봉 대피소까지 가는데 정말 ‘악’ 소리가 절로 났다. 해발 1000m를 지날때 쯤엔 주변에 아무도 없고 혼자 동떨어져 외롭게 걷고 있다고 자각하는 순간, 갑자기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떤 가족은 이미 구름다리 전에 돌아갔다. ‘뭐 힘들면 돌아갈 수도 있는거다’ 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난, 할 수 있다”라고 소리쳤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그래 해보자, 아자, 아자, 난 할 수 있다” 하고 또 한번 소리쳤다. 미친 사람처럼.

등산하다가 힘들 때마다 떠오르는 곡이 있다. 조쉬 그로반의 ‘You raise me up’.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내 마음이 우울하고, 내 영혼이 지칠 때)/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고통이 밀려와 마음이 무거울 때)...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당신은 나를 일으켜 산 정상에 설 수 있게 해줘요)/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당신은 나를 일으켜 폭풍이 부는 바다를 걷게 해줘요)

오전 7시에 출발해 5시간 만에 삼각봉 대피소에 다다랐다.그 순간, 정말 벅차오르는 감동이 눈앞에 펼쳐졌다. 삼각봉은 젊은날 갔던 스위스 알프스보다도 아름다웠다. 삼각봉의 아름다움에 감동해 ‘찐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심지어 백록담 언저리엔 허연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다. 왕관릉(1666.3m) 옆을 지나 이제 9부 능선을 넘자 생각지도 못한 ‘신의 선물’을 받았다. 올해 첫 상고대라는 선물을.

태양에 보석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구상나무에 내려앉은 빙꽃. 휴대전화에 이 광경을 담으려고 보니 이게 웬일인가. 배터리가 방전됐다. 내 몸의 모든 기운이 빠져 나가듯 번아웃된 휴대폰. 휴대폰이 방전될 만큼 난 아주 멀리, 아주 높은 곳까지 오르는데 성공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인증샷도 못찍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좌절했고 절망했다. 백록담이 가까워졌는데 난 내 눈앞에 펼쳐지는 평생 잊지 못할 상고대의 눈부시도록 시린 절경을 카메라 담을 수 없다니 이게 무슨 신의 장난인가.

그래도 고지가 눈앞인데 포기할 수 없는 난 결국 백록담 정상을 기필고 밟았다. 그리고 이내 두리번거렸다. 오다가 감귤을 나눠준 커플을 찾고 있었다. 카메라를 좀 빌려 찍고나서 내 전화로 ‘전송해달라고 부탁해야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몰염치의 극치.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누가 휴대전화를 빌려주고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까지 전송해주겠는가 포기하려는 순간, 출렁다리에서 만나 사진을 찍어줬던 50대 남자를 발견했다. 무조건 다가가 사정했다. 그런데 그는 흔쾌히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으라며 휴대폰을 건넨다. CJ에 다니는 장훈식씨였다. 업무차 제주에 왔다가 짬을 냈단다. 나의 구세주. 고마운 사람, 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시길…. 난, 남의 휴대폰으로 찍은 상고대를 몇장을 간직하고 있다. 잃어버리면 안되는 보물처럼.

하산길에서 가장 힘든 시간은 종착지를 앞둔 약 40여분. 주저앉고 싶을 만큼 다리가 아프다. 절로 팔자보다 심한 팔자걸음이 된다. 다음날 아침이 걱정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2~3일동안 바보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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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서 만난 가을과 겨울 사이. 제주 강동삼 기자
한라산에서 만난 가을과 겨울 사이. 제주 강동삼 기자


# 병풍바위에 반하고 영실기암에 빠지고…그렇게 두번째 산행, 윗세오름을 가다그렇게 100m 높이의 오름도 못 오르던 나는, 결국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을 정복했다. 대견스러웠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정상을 올랐다는 자심감은 일주일 후 또 한번 한라산을 오르게 만들었다. 영실 탐방로에서 윗세오름을 거쳐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는 1740m. 아주 어릴 때 딱 한번 영실로 해서 한라산 백록담까지 갈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한라산의 경이로운 풍경을 아직도 있지 못한다. 상고대의 아름다움과 비교도 안될 지 모르지만, 아찔한 벼랑 끝 영실이 주는 위엄한 자태는 꿈엔들 잊히지 않았다.

이날도 영실 탐방로에서 만난 병풍바위와 영실기암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외국인 탐방객들도, 처음 온 도민도 탄성을 지르며 병풍바위를 배경삼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난 지난번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으려고 GPS도 끄고 와이파이도 껐다. 절친이 뒤늦게 조언해준대로 실행했다. 한라산 갈 때는 무조건 보조용 배터리를 가져가던가, 최대한 휴대폰을 카메라 단순기능으로 만들어 놓으라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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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코스서 만난 기암절벽. 제주 강동삼 기자
영실코스서 만난 기암절벽.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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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병풍바위. 제주 강동삼 기자
영실 병풍바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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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기암과 오백나한 너머로 서귀포 범섬 등이 보일락말락 눈에 밟힌다. 제주 강동삼 기자
영실 기암과 오백나한 너머로 서귀포 범섬 등이 보일락말락 눈에 밟힌다. 제주 강동삼 기자
아무튼 난, 올라오는 탐방로의 풍경에 반했지만, 셔터 누르는 걸 꾹 참았다. 자제한 덕분인지, 병풍바위를 만났을 때도 내 충전기는 70% 가까이 남아 있었다. 행복한 미소가 터져나왔다. 선작지왓을 지나 전망대에서도 내 휴대폰으로 한라산 백록담을 담을 수 있었다. 족은윗세오름, 노루샘을 지나 윗세오름대피소 목적지에 도착했다.

관음사에서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지 갈때 걸렸던 5시간 넘는 시간과 싸워 이긴 전력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영실입구서 윗세오름까지 가볍게 산책하듯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근거없던 자신감은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윗세오름은 영실 등반로의 해발 1600~1700m 고지 정상부근에 펼쳐진 붉은오름, 누운오름, 족은오름, 3개 오름을 일컫는다. 그래서 웃세오름이라고도 불린다.

백록담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일주일 전에 가본 그 백록담을 보며 난 미소를 머금었다. 정상을 밟은 자의 여유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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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은윗세오름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살아 백년 죽어 백년산다는 구상나무. 제주 강동삼 기자
족은윗세오름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살아 백년 죽어 백년산다는 구상나무.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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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병풍바위, 윗세오름 대피소옆에 있는 표지석, 어리목 탐방로에서 만난 한라산겨우살이. 제주 강동삼 기자
영실 병풍바위, 윗세오름 대피소옆에 있는 표지석, 어리목 탐방로에서 만난 한라산겨우살이. 제주 강동삼 기자
관음사 탐방로에선 한국의 알프스 삼각봉을 만나고, 영실에선 병풍바위와 오백장군을, 성판악코스에선 진달래밭을 만날 수 있건만. 풍경이 밋밋해 ‘비추’하고픈 탐방로가 바로 어리목 탐방로다. 참고로 영실로 윗세오름을 올라가도 다시 영실로 내려오길 권한다. 물론 영실탐방로에서 주차장까지 택시를 붙잡고 내려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도 절경과 재회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된다.

그래도 이날은 소득이 있었다. 어리목 1000m 탐방로 쯤 하산길에서 한라산겨우살이를 만났다. 마치 죽음 앞에서 좌절하다 한라산이란 어깨에 기대어 다시 일어서는 내 자신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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